후지이 다케시 [폭력의 예감]에 비추어 본 트위터 페미니즘 논쟁 양상


2015 3월 트윗 타래글 백업



1) '폭력의 예감'에 의거해 김태훈 사건을 되짚어보면 김태훈의 실수로 인해 혹여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말조심해야지, 비슷한 흔적이 있다면 지워야지, 하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폭력의 징후에 대비해 자기검열에 들어간 부류가 있었는지 의문


2) 오히려 김태훈 칼럼에 분노하는 여성들을 보고 
김태훈이 글을 후지게 써서 그렇지 사이비 페미니즘이 있는건 맞잖아, 라고 김태훈의 발언에 동조하며 
사이비 페미니즘 실재하는가 여부로 논의를 확장시켜 갔던 것을 생각해보면.

3) 실제 김태훈 발언에 불쾌감을 표한 여성들에게서 어떤 ‘폭력의 징후’를 예감했다면 
김태훈하고 나하고 완전 다른 인간임을 어필하고, 
어떤 맥락에도 동의할 수 없음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서서 어필했을 것.


4) 후지이 다케시가 덕후였던 흔적 자체를 지우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기종 사건에서 그와 분명한 선긋기를 한 진보세력과 마찬가지로.


5) 하지만 칼럼 제목의 지나침과 김태훈이 잘못 알고 있는 몇가지 팩트에 대한 교정, 글이 후지다 정도의 평가가 있었을 뿐, 
후지이 다케시가 언급한 정도의 폭력의 징후를 느낀 행동들이 있었다고 보긴 어려움

6) 김태훈 칼럼의 어떤 표현에 대해선 동조 태도까지 보이고 그 동조에 발끈한 이들이 결국 
해쉬태그선언에까지 이르자 이제는 김태훈보다 해쉬태그 하는 이들과 선 긋는데 몰두. 
너네들의 행동은 폭력이다, 어쩌고 하면서.


7) 일련의 맥락에서 그들이 보여준 행위 자체가 ‘폭력의 예감’에 의한 자기검열에 의한 행동이라 보긴 어려움. 
김태훈보다 오히려 해쉬태그페미니스트를 상대로 강경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더 확고하게 드러낸 것을 생각하면.


8) 후지이 다케시가 언급한 폭력은 내가 문제를 저지른 이와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는 것이 사회에 어필되지 않을 경우 
실제로 사회로부터 폭력이 행해지지 않더라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는 시선이 
사회 전반에 암묵적으로 깔려 공고히 작동하고 있을 경우인데.


9) 김태훈 발언의 경우는, 혹여 해쉬태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 받아도 
그들이 사회로부터 완전 배척되는 것은 아닌, 
오히려 페미니즘 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동하는 가부장적 마인드를 가진 다수의 남성 쪽으로 도피할 수 있는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점, 또한 그것이 페미니즘보다 훨씬 강고히 사회에 작동하고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


10) 말로는 ‘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네’ 라고 하거나 ‘너네 행동 폭력적이야, 낙인찍기야, ’ 라고 했지만 
그런 발언에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것은 ‘폭력의 징후’를 예감한 공포에 대한 반동작용이 아닌 
그저 ‘짜증’ 내지는 ‘불쾌’ 정도의 감정정도.


11) 또한 김태훈이 휘두른 언어폭력이 후지이 다케시가 언급한 ‘고독의 산물’ 따위가 아니었음을 상기해볼 때. 
고독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여성혐오정서와의 공모 내지는 협업의 산물이었음을 감안하면.


12) 실제 처음에는 칼럼 제목 정도는 비판하던 이들이 갑자기 너네가 개저씨 만행 전시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라며  
평소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느끼는 일상적 불편함을 토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던 것을 감안해보면


13) 자신의 의견이 해쉬태그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 받아서 짜증나면 
사회 전반에 깔린 가부장적 마인드라는 안전망으로 잠시 도주했다가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는 이들의 일관성 없는 태도를 합리화 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줄 안다’거나 혹은 ‘약자됨의 무기’ 같은 표현


14) 약자가 무기를 휘두르면 강자 쪽으로 도망가면 됨. 누구 표현대로 말 그대로 권력의 시선을 체화하는 것.


15) 후지이 다케시가 한겨레 칼럼에서 언급한 정도의 폭력의 정도는 누군가 나에게 실제로 무기를 휘둘렀을 경우, 
내가 도망갈 곳이 한치도 없는, 그런 종류의 고립공포가 존재해야 함.


16) 여차하면 살짝 발 담궜다 올 수 있는, 나와는 성향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나를 딱히 내치지도 않을 
어떤 종류의 사회안전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위협적인 존재’라 명명한 대상이 실제로 위협적이지 않다는 방증


17) 진보저씨라 불리는 이들이 해쉬태그페미니스트들로부터 폭력의 예감을 느꼈다는 것은 
박원순 시장이 동성애옹호 논란 당시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을 부정당했다며 불쾌함을 표시한 정도와 비슷한 수준


18)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폭력의 예감이 아닌 ‘불쾌의 예감’ ‘짜증의 예감’과 비슷한. 
박원순도 본래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진보성향의 일부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자 
소수 지지세력보다 더 큰 힘을 사회에 행사하는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을 보면


19) 일련의 맥락으로 살펴보면 김태훈 칼럼사건에서 해쉬태그선언에 이르기까지 
해쉬태그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는 세력이 실제로 해쉬태그페미니스트들로부터 폭력을 예감했다고 보기는 힘듦.


20) 닥쳐올 짜증과 불쾌를 예감했다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 

이를 테면 사회에 존재하는 강자의 시선에 맞춰 자기검열을 하는 이들의 행위가 '폭력의 예감'이라면 
약자의 시선에 대한 것은 '불쾌의 예감' '짜증의 예감'이 더 적확한게 아닌가 싶음


21) 전자의 경우 내가 이 사회의 주류정서로부터 낙인 찍혀 소수자로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딱히 도망갈 다른 선택지도 없는, 선택지가 있다해도 그 선택지에 속한 이들 또한 이미 사회로부터 낙인 찍힌, 
그런 정도의 고립공포를 예감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자신이 속한 소수의 공동체로부터는 비난받고 상처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 소수그룹과 결별해도 완전히 고립되는 것은 아닌, 
그와 반대되는 세력이 사회 주류에 존재하기 때문에 선택에 따라서는 그 주류에 투항할 수도 있는 그런 선택지 정도는 존재

그래서 여차하면 오히려 그 주류정서에 기대 자신에 대한 소수그룹의 비난이나 비판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아니 오히려 그 주류정서를 이용해 자신이 속해 있던 소수그룹을 공격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인줄 안다, 는 표현이나 너네가 그러면 연대해줄 생각 없음,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도 
결국 저런 맥락이 있기에 가능한 것.


22) 그러니까 '폭력의 예감' 같은 표현을 쓰려면 후지이 다케시가 느끼는 정도의 고립공포가 
구조적으로 존재 가능한 곳에 쓰는 것이 맞지 
아무데나 폭력의 예감, 파시즘, 선동질 딱지 붙이는 행위는 상징질서가 벌이는 전횡과 별 다를 바 없는.


23) 내 안의 일베 내 안의 김기종을 인식할 정도면 내 안의 가부장 마인드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가부장적인 마인드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나에겐 가부장적 마인드가 없어라고 확신할 게 아니라 
내 안에도 가부장적 마인드가 있을지도 몰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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